새전북 신문 칼럼 [약자에대한 폴력은 가해자만의 문제인가]
약자에 대한 폭력은 가해자만의 문제인가
새해의 기대가 아직은 따뜻한 1월, 2014년 동안 아팠던 것들이 다시는 없길 바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이런 바람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아는데 몇 초짜리 동영상 하나로 충분했다.
단순히 맞는 모습이 아니라 폭력에 나가떨어지는 아이를 보는 순간 느낀 분노는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하는 절망감으로 변했다.
그 사건 이후 뉴스는 온통 그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에 대한 비난과 온갖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폭력을 근본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일지 회의가 든다.
어쩌면, 힘을 가져야만 한다는, 성공해야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회구조 안에 있는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어린이집 보육교사과정이 쉬워서 누구나 보육교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어렵게 하면 안 일어날까? 일의 환경이 열악하고 보수가 충분하지 않아서 일어났다고도 한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럼 보수를 높이면 해결되는 것일까? 혹자들은 감시시스템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럼 CCTV로 도배하면 해결되는 것일까?
이런 해결 방법들은 미진한 것들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괘찮은 것인가?
어설프게 말하는 해결책들이 정말로 우리사회의 약자에 대한 폭력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 사회가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언제든 이런 폭력은 가장 나약한 존재를 대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폭력은 수평관계가 아닌 언제나 수직 관계에서 발생한다. 위에 선 자들이 바꿔야만 한다.
나약한 존재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회는 언제든 또 잔인해 질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체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이런 소식은 늘 우리를 순간순간 분노하게 하리라는 것을 누구든 알 수 있다.
이러한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요즘말로 ‘갑’에 대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 솔직해져야 한다.
‘갑’이 되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며 살아온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한다.
아이들에게도 갑이 되길 원하며 좋은 성적만을 요구하며 친구관계도 그 성적을 위해 가려 사귀야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게 만든 우리다. 모르는 아이의 울음에는 관심도 없이 지나치는 우리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보다는 내 말에 군말 없이 따르는 선생을 원했던 우리다. 청소년들의 일탈을 보고도 내 아이의 일이 아니면 조금도 관심이 없던 우리다. 추운데서 수고하는 노동자들보다는 돈은 쓰고 나오는 내가 대접 받야 한다고 믿는 우리다. 장애인 시설에서 성폭력이 일어났는데도 무덤덤한 우리다. 대학에 교비 횡령 등의 비리로 대학에서 물러났던 총장이 다시 총장으로 선임되었는데도 내 대학의 일이 아니면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는 우리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져도 내일이 아니면 관심 끊는 것이 상책이라며, 오지랖 넓은 사람들을 타박했던 우리다. 나만 그러한 약한 ‘을’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게 혼자일 수 없다. 원하건 원치 않건 수많은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을 더 강하게 하고 그 강한 연결을 더 따뜻하게 만들 때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는 뉴스들은 조금씩 줄일 수 있다.
내가 약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약자들에 대한 아픔에 그동안 우리는 둔감하지 않았는지 아프게 반성해야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폭력은 언제나 찾아올 것이고 어쩌면 다음엔 ‘나’를 향할 것이 분명하다.